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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주 칼럼] 눈 가린 정의

by admin

정의의 여신상은 그리스 신화 디케(Dike)에서 유래한다. 로마 신화에선 디케가 유스타치아(Justitia)로 불렸다. 정의(justice)의 어원이다.

정의를 상징하는 디케 여신상은 한 손에 공정함을 상징하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 엄격한 집행을 의미하는 칼을 들고 있다.

의아한 건 눈이다. 정의의 여신상은 눈 가리개를 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의 분별력이라도 눈을 가리고 있으면 공정함을 보기 어렵다. 저울 추가 어디로 기울었는지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균형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공정함을 위해 눈을 가렸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아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의의 여신상 눈가리개에 의견이 분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혹자는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린 것이라 하고 다른 이는 왜곡된 판결에 대한 풍자라고 한다.

한국을 강타한 인문학 서적 중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다.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에 ‘정의’에 대한 속시원한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저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독자를 고민에 빠뜨린다. 독자들은 선택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례 속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신은 전차 기관사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빠른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 앞에 인부 다섯명이 작업을 하고 있다. 열차를 멈추려 했지만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 세울 수 없다. 이 때 오른쪽에 비상철로가 눈에 띈다. 그 곳에는 한 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린다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사람이 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답없는 문제들의 답을 내기 위해 골몰하게 하고,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자유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체주의 등 전문적인 정치 철학들이 쉴새없이 쏟아지는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책은 왜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을까. 이유의 저변에는 정의에 대한 갈급함이 자리하고 있다.
병에 걸렸을 때 건강이 더 크게 보이듯 만연돼 있는 부조리와 부당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를 갈구하게 만든다.

‘정의 열풍’은 거대 권력의 부정의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의 고뇌와 반성이 만들어낸 ‘대리만족’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 웹스터가 올해 단어로 ‘정의(justice)’를 선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추문과 러시아 스캔들의 영향이라는 게 주된 분석이다.

힘과 권력 앞에 또 다시 ‘정의’가 고뇌하고 있다. 트럼프 탄핵설까지 솔솔 새어 나오는 현실 속에서 정의의 여신은 여전히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과연 정의의 여신은 왜 눈가리개를 했을까.
진실과 정의를 분별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항하지 못해 애써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새삼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최윤주·텍사스 한국일보 발행인 choi@koreatimest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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