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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니모의 삶, 한인 디아스포라 ‘표상’

by admin
  • 전후석 감독,“헤로니모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표상”
  • 달라스 한인회, 무료상영회 실시


디아스포라. 본래 그리스말이지만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글로벌 단어가 된 말이다. 디아스포라는 특정민족이나 집단이 조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사는 것을 뜻한다.

미국에서 잘 나가는 한인 2세 변호사의 삶을 180도 바꿔버린 단어도 ‘디아스포라’다. 그리고 ‘운명’같이 그의 삶에 들어와 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버린 인물이 바로 쿠바의 정신적 지주 고(故)헤로니모 임, 한국명 임은조 선생이다.

18일(목)부터 25일(목)까지 일주일간 열린 달라스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달라스를 방문한 전후석 감독(35)이 말하는 디아스포라에는 재외 한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겨있다.

재외 한인들이 걸어온 디아스포라의 과거는 그가 만든 영화 ‘헤로니모’,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국명 임은조, 쿠바명 헤로니모 임(Jeronimo Lim Kim 1926~2006)의 삶으로 대변된다.

고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 씨.

헤로니모 임은 애국지사 임천택 선생의 아들이다. 에니깽 농장에 팔려온 후 처절한 이민생활을 영위하는 중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부친의 삶은 아들 헤로니모 임의 삶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이민 2세였던 헤로니모 임의 삶은 철저하게 쿠바인이었다. 그는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끈 주역이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 헤로니모 임은 혁명정부의 경제개혁을 전담,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을 역임했고, 1959년에는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8년 식량구매 국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100% 쿠바인이 되어 조국을 위해 삶을 바친 혁명가 헤로니모의 삶은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거주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한인 2세들의 삶이 많은 부분 오버랩 된다.

쿠바혁명가 고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의 삶을 영화화한 전후석 감독.


그러나 전후석 감독이 주목하는 부분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헤로니모 임의 인생은 1995년 쿠바 한인대표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광복 50주년 한민족 축전에 참석한 후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100% 쿠바인으로 살아온 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깨달은 것이다.”

헤로니모 임은 이후 11년간 쿠바 한인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는 작업에 인생을 바친다. 한글학교를 세우고, 뿔뿔이 흩어진 한인회 재건에 힘을 모았으며, 한국과 쿠바 한인들의 잇는 가교역할에 헌신하며 한인사회 복원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누구보다 쿠바인이 되고 싶어했고, 이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헤로니모는 결국 100% 한국인이었다.
전후석 감독은 “한반도 밖에서 완벽한 쿠바인으로 살아간 그의 삶은 한인 디아스포라의 존재 가치이자,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라고 말한다.

그가 변호사 타이틀까지 벗어 던지고 영화 <헤로니모>를 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헤로니모의 삶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길 바라는 의도가 담겼다. 또한 한반도에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나라밖에서 살고 있는 재외동포 디아스포라를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전 감독은 “쿠바 한인 4세들은 100% 혼혈이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한국인이라 말한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지만, 정작 이들이 한국에 가면 한국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 취급한다”며 안타까워한다.

“재외동포 800만 시대다. 디아스포라의 범위를 축소시킬수록 손해다. 국적과 순수혈통으로 ‘한국인’을 규정하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묵직한 교훈을 던진다.

최윤주 기자 choi@koreatimest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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