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입 품목 대부분에 개별 허가 받아야
반도체ㆍ디스플레이 관련 업체 타격 우려
일본 정부가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ㆍ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면서 한국 경제에 미칠 파장이 큰 관심사다. 이날 각의(국무회의)에서 관련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이 결정되면서 2004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 올랐던 한국은 15년 만에 일본의 ‘안보 상 우호국’에서 이름을 내리게 됐다.
해당 개정안은 주무장관의 서명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서, 일왕의 공포 절차를 거친 시점으로부터 21일 후 효력을 얻는 만큼 이달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수출심사 ‘입맛대로’ 조절할 듯
일본의 ‘믿을 수 있는 국가 명단’인 화이트리스트는 수출 심사 과정에서의 우대 조치를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권 국가에 대해 핵과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의 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만들어진 핵공급국 그룹(원자력), 호주 그룹(생화학 무기), 미사일 기술통제 체제(미사일), 바세나르(재래식 무기) 등 4대 수출 통제 체제에 기반을 둔 제도다. 여기에 가입한 29개국은 상호 신뢰한다는 ‘안보 회원국’이라는 뜻에서 서로 간의 수출 허가를 간소화해 주는 일종의 화이트리스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도 대외교역법에 따른 ‘가’ 지역(28개국)이 있다.
통상적으로 일본에서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된 국가에 ‘민감한’ 품목을 수출할 땐 3년 단위로 수출허가를 받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다. 반면 일반 국가는 6개월 단위로 허가를 신청하고, 심사를 90일까지 받는다.
이에 따라 각의 결정이 최종적으로 집행되면 한국 업체는 앞으로 일본으로부터 규제 품목에 해당되는 물품을 수입할 때마다 목적과 용도, 최종 수요지 등을 알리고, 수입 물품을 대량살상무기(WMD)나 이를 운반할 용도가 아닌 민간용으로만 사용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도 보내야 한다. 한마디로 이전에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 시 초고속 ‘KTX’를 이용했다면 이젠 보다 느린 ‘무궁화호’로 물품을 옮겨야 하는 셈이다.
일본이 규제 대상으로 정한 품목은 첨단소재ㆍ전자ㆍ통신 등 전략물자를 포함해 1,100여개에 달한다. 특히 한국 경제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반도체ㆍ디스플레이 분야의 소재ㆍ부품 장비가 다수 포함된 만큼 해당 업체의 타격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규제 대상 외의 품목에도 ‘캐치올(Catch all)’ 제도로 군사 전용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개별적으로 수출 허가 신청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실상 식품과 목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에서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보다 큰 문제는 일본 정부 입맛에 따라 한국에 대한 수출을 허가, 불허하거나 지연시키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달 4일부터 수출 규제를 적용한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은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수출 허가도 내려지지 않았다.
◇”침소봉대 말아야” “일본도 피해”
반면 생각보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인한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침소봉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제현정 무역협회 통상지원단장은 이날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당장 관세를 부과한다거나 수출 금지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침소봉대 할 것은 없고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수출업체가 정부로부터 전략물자 등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한다는 뜻의 ‘자율준수기업’ 인증을 받으면 한국으로의 수출에 대한 통제가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단장은 그러면서 “기업들이 일본이랑 한두 해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 기업들이 파트너인 일본 기업들 파트너들과 계속 (관련 대책을)얘기하고 있다”며 “비즈니스 거래가 이런 것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그러진 않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일본 역시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로 일정 부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자기 목숨을 포기하면서도 상대방한테 피해를 입히는 가미카제식(神風ㆍ자살폭격) 공격”이라고 꼬집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일본의 특공대 가미카제를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 움직임에 빗댄 말이다. 최 교수는 이어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로서는 수입 다변화나 국산화를 할 수밖에 없다”며 “일본은 주요 고객을 잃어버렸을 때 한국 말고 다른 곳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 제조업도 상당 부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클릭하면 한국일보 온라인 최신호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