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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해킹정국이다.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 의혹에 이어, 국정원이 대선을 목전에 둔 시점에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을 상대로 불법사찰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북 정보전을 위한 정당한 활동이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처음엔 “연구용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가 이 해명이 통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갑자기 ‘대북 정보전’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나 유출된 해킹팀 자료분석에 따르면 이탈리아 해킹팀이 국정원 관련인물로 보이는 아이디 ‘devilangel(데빌엔젤)’의 의뢰를 받아 악성코드를 숨겨놓은 공격대상은 네이버의 요리 카페나 지방자치단체의 행사 홍보 홈페이지, 심지어 포르노 사이트였다.
국정원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남파된 북한 공작원들이 블로거가 추천하는 떡볶이집과 지자체의 벗꽃축제, 낯 뜨거운 포르노 사이트의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는 게 된다.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정권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긴급수혈했던 것이 ‘애국심’이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그랬고, 온 국민의 아픔이었던 세월호 때도 그랬다.
국정원의 대국민 사찰 의혹이 불거진 지금, 여지없이 애국심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국무위원들의 가슴에 달린 태극기 배지가 대표적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행정자치부 주도로 이뤄진 캠페인이란다.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다.”
18세기 영국의 평론가 새뮤얼 존슨이 한 말이다.
뭔가 복잡하고 대단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단순한 뜻을 담고 있다.
그가 편찬한 사전에 적힌 ‘애국자’의 설명을 보면 그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하게 포장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야 한다.”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정권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정권을 국가와 동일시 하고, 애국을 정권에 대한 충정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만큼
효과적인 백신이 없다.
버젓이 국민을 해킹하고도 “국가 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결과에 대해 책임 또한 따라야 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국정원의 성명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 대한민국 거대여당인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가 “국정원은 우리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직”이라는 말로 힘을 실어줬고 원유철 원내대표는 “국가 안보를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다”고 거들었다.
한국사회가 급속히 공안시대로 가는 것을 두고 여러 갈래의 분석이 나오지만, 그중 가장 주요한 요인은 ‘국가=정권’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지난해 천만 관중을 동원했던 영화 <변호인>이 외쳤던 명대사다.
그리 특별한 것도 없는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국가란 국민입니다!”는 말만 덧붙인 것이다.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권력에서 소외된 형국은 영화 속 1980년대나, 현실 속 2015년이나 여전히 별반 다를 바 없다.
이 또한 블랙 코미디다.
[코리아타임즈미디어] 최윤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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