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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잔인한 4월

by admin
작년 이맘때 그들은 또 다른 ‘우리’였다. 
이른 아침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 후 
직장에서 집에서 분주한 하루를 보내는 
어제 같은 오늘을 살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삶은 너무나 달라졌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가슴 속엔 풀리지 않는 통한의 응어리가 가득하다. 
참아지지 않는 고통 위에 
딱지가 앉고 내성이 생길 만도 한데 
심장을 후벼 파는 아픔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도가 세진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왜’다. 
이유를 알기 위해 단식도 하고 노숙도 하고 
농성도 하고 진도에서 서울까지 걷기도 했지만,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싸늘하다 못해 서슬이 시퍼런 ‘또 다른 왜’였다. 
죽은 자식 놓고 왜 갑질이냐, 
사람들이 왜 이렇게 질기냐, 
왜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냐. 
자식잃은 아픔에서 왜 벗어나지를 못하느냐….
지난 2일(목) 처음으로 ‘삭발투쟁’이라는 것을 해보는 
한 아빠가 광화문 광장에서 피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목숨 달라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애기들 
왜 죽었는지는 알고 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 알려주시면, 
저희 목숨드릴 테니까 제발 좀 알려주세요.”
길었던 머리를 밀어버린 한 엄마도 외쳤다.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애들 억울한 것만 밝혀준다면, 
제가 죽어 밝혀진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새끼 왜 죽었는지 똑바로 알고 죽어야겠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머스. 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약하디 약한 생명들이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잔인하다고 표현한 것.
하지만 2014년 대한민국의 4월은 정반대였다. 
살고자 몸무림치던 약하디 약한 생명들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검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죽음과 침묵을 갈구한 엘리엇의 4월은 
라일락을 키워내고 대지 아래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워내지만, 
죽음과 침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의 4월은 
그 때 이후로 시간이 멈춰져 버렸다. 
사람답게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부모들의 멈춰진 삶은 1년 365일이 4월 16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시간은 일분일초가 잔인하다. 
사람답게 살래야 살 수가 없다.
“그는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말하기의 무능은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뉴요커’의 기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그는 신념도 악의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 저지르는 잔인한 악행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낸 세월호 사건, 
그리고 지난 1년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모습들은 
이제 명백하게 우리 각자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희생자에게 가해지는 믿기지 않는 국가폭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무능, 눈감아 버리는 외면, 말하지 않는 침묵,
이 ‘악의 평범성’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차디찬 암흑의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제 자식을 
눈 앞에서 바라만 봤던 부모들의 피끓는 절규와 분노는 
국가 권력 앞에서 한없이 미약하기만 하다.
‘악의 평범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능,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무기력한 방관.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더 아프다. 
최윤주 편집국장 choi@koreatimest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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