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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이 함께 냇가에서 목욕을 했다.
별로 씻고 싶지 않았던 거짓은 대충 물만 묻히고 나와
진실이 벗어놓은 깨끗한 옷으로 말쑥하게 차려 입은 후 떠나버렸다.
뒤늦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진실은 거짓의 더러운 옷을 입기 싫었다.
그 때부터다.
거짓은 자신이 진실인양 떠들며 다녔고
벌거벗은 진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을 수 밖에 없었다.
라퐁텐 우화집에 나온 얘기다.
참으로 기가 막힌 비유다.
진실의 옷을 입은 거짓이 진실행세를 하고,
벌거벗은 진실은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니,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진실게임이 딱 그 짝이다.
도처에서 진실이라 떠드는데 진실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논리와 그럴듯한 정황의 옷까지 입고 있어
진실인 줄 알고 다가가면 거짓의 악취가 진동하고,
진실이라고 우겨 한 꺼풀 벗겨보면 더러운 음모가 각질처럼 일어선다.
독일의 한 조사기관에서 ‘누가 하는 말을 진실이라고 믿느냐’는 조사를 했다.
‘의사’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고,
‘기자’와 ‘정치가’는 형편없는 하위였다.
정치인은 그렇다 쳐도 ‘진실 보도’를 사명으로 하는
기자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것을 보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기레기(기자+쓰레기)’의 여론조작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아예 기자와 정치인의 팀플레이가 환상이다.
리퍼트 미국대사 피습사건을 두고 한동안 한국이 시끄러웠다.
미국에서도 ‘테러’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한국사회 스스로가 ‘테러’라는 단어를 서슴지 않는다.
‘종북논리’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보수언론이 나서서 ‘북한의 지령’을 운운하며
‘아니면 말고’ 식의 음모론을 여지없이 부추겼고,
집권당의 고위인사가 ‘한미동맹을 깨려는 종북 좌파들의 시도’라며 양념을 쳤다.
진실이라는 옷을 훔쳐 입은 화려한 언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어디까지가 견제이고 어디까지가 계산인지
일반인들의 눈으로 판가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한인사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서 자신이 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정작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대체 진실은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법정에서 진실공방을 가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긴 어렵다.
사법기관이라고 해서 수많은 거짓더미 속에서
언제나 진실만을 도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몇 달간 달라스 한인사회는 참으로 힘들었다.
‘이전투구’ ‘진실게임’ ‘법적공방’으로 정리되는 참담한 시간을 거쳐왔지만,
다수의 한인들은 진실 앞에선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거짓에 대해서는 불처럼 뜨거워지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거짓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에 진실의 조각이 있고, 진실에 거짓의 파편이 있을 수 있다.
때문에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인생을 고결하게 사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했다.
“거짓이 세상에 있도록 두자.
심지어 거짓이 승리하는 것도 그대로 두자.
그러나 나를 통해서 그렇게 되도록 하지는 말자.”
적어도 ‘나’를 통해서 거짓이 판을 치게 만들지는 말자.
아름다운 건 진실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목마름이니까.
최윤주 편집국장 choi@koreatimestx.com